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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헌혈 버스가 학교에 왔다가 철분 부족 판정을 받고 그냥 돌아선 적이 있습니다. 평소 뭐든 잘 먹고, 잘 자고, 어지럽지도 않았는데 왜 제가 철분이 부족하다는 건지 당시엔 도무지 이해가 안 됐습니다. 빈혈이란 건 TV 드라마 속 연약한 여주인공이나 걸리는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최근 혈액 전문의의 강의를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그때 제가 얼마나 빈혈에 대한 상식이 틀려있었는지 새삼 확인하게 됐습니다.

빈혈의 원인과 증상 — 어지럼증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빈혈은 그냥 '어지러운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훨씬 폭넓은 이야기입니다. 빈혈이란 혈액 속 적혈구, 정확히는 헤모글로빈(hemoglobin) 수치가 기준 이하로 떨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서 헤모글로빈이란 적혈구 안에 있는 단백질로, 폐에서 흡수한 산소를 온몸의 조직에 실어 나르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부족해지면 온몸에 산소 공급이 줄어들면서 다양한 증상이 나타납니다.
제가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는, 빈혈 증상이라고 하면 갑자기 눈앞이 하얘지며 쓰러지는 장면만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만성 피로, 손발 저림, 계단 오를 때 유독 숨이 찬 느낌, 두근거림, 의욕 저하, 추위를 유독 많이 타는 것까지 전부 빈혈 증상에 포함됩니다. 현대인들이 흔히 '스트레스 때문이겠지'라고 넘기는 증상들이 사실 빈혈 신호일 수 있다는 점이 꽤 충격적이었습니다.
헤모글로빈 수치 기준으로 보면, 성인 남성은 13 이하, 비임산부 성인 여성은 12 이하, 임산부는 11 이하일 때 빈혈로 진단합니다(출처: WHO 빈혈 진단 기준). 수치가 9 아래로 내려가면 대부분의 환자에서 증상이 뚜렷하게 악화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특이한 사례로는 얼음을 하루 종일 찾아 먹는 이식증(pagophagia)이라는 증상이 있는데, 여기서 이식증이란 음식이 아닌 물질을 반복적으로 섭취하려는 충동으로, 철결핍성 빈혈 환자에게서 나타나다가 철분을 보충하면 사라지는 독특한 증상입니다.
빈혈이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원인이 아닙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적혈구 자체가 덜 만들어지는 경우와 적혈구가 정상적으로 만들어지지만 빠르게 파괴되는 경우입니다. 전자에는 철결핍성 빈혈, 거대적아구성 빈혈, 재생불량성 빈혈 등이 포함되고, 후자에는 용혈성 빈혈이나 발작성 야간 혈색소뇨증(PNH) 같은 희귀 질환이 속합니다.
철결핍성 빈혈 — 가장 흔하지만 가장 오해받는 유형
빈혈이라고 하면 으레 '철분 부족'이라고 단정 짓는 경향이 있는데, 저도 그 오해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전체 빈혈 환자의 약 70% 이상이 철결핍성 빈혈이긴 하지만(출처: WHO), 나머지 30%는 철분과 전혀 무관한 원인이라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됩니다. 철분제를 먹어도 빈혈이 낫지 않는다고 답답해하는 분들이 있다면, 바로 그 30% 쪽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철결핍성 빈혈이 발생하는 주된 이유는 철분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속도가 섭취량보다 빠를 때입니다. 가임기 여성은 매달 월경으로 인한 실혈이 주요 원인이고, 40대 이후 남성이나 폐경 후 여성에게는 위장관 출혈이 가장 흔한 원인입니다. 체내 철분은 매일 1~2mg 정도가 대변이나 표피세포 탈락으로 자연 소실되는데, 이 소실량보다 섭취와 흡수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저장고가 서서히 비게 됩니다.
여기서 페리틴(ferritin)이라는 수치가 중요합니다. 페리틴이란 체내 철분 저장량을 나타내는 지표로, 이 수치가 낮다는 것은 철분 저장고가 거의 바닥났다는 신호입니다. 헤모글로빈 수치가 아직 정상 범위에 있더라도 페리틴이 낮으면 이미 철 결핍 상태가 상당히 진행됐다고 보는 편이 맞습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개념이 기능적 철결핍입니다. 기능적 철결핍이란 체내 저장된 철분의 양은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염증이나 만성 질환으로 인해 철분이 골수까지 이동하는 경로가 막혀 실제로 혈액 생성에 쓰이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만성 질환 환자의 약 60%, 암 환자의 경우 70%까지 이 상태에 해당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어, 무조건 경구 철분제만 처방하는 것이 아닌 전문가 판단이 필수입니다.
- 가임기 여성: 월경으로 인한 반복적 실혈이 주원인
- 40대 이후 남성·폐경 후 여성: 위장관 출혈 가능성을 반드시 확인
- 임산부: 철 요구량이 급격히 증가해 조산·저체중아 위험과 직결
- 만성 질환·암 환자: 기능적 철결핍 상태일 가능성이 높아 별도 치료 접근 필요
치료 기간과 방법 — 2개월 만에 끊으면 다시 도집니다
철분제를 먹기 시작하면 빠르면 2개월 안에 헤모글로빈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옵니다. 이 시점에서 '다 나았다'고 생각하고 복용을 멈추는 분들이 꽤 있는데, 그건 굉장히 위험한 판단입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강의 속 실제 사례를 보면 19세 환자가 4개월 만에 빈혈이 교정됐음에도 치료를 중단했다가 3년 후 혈색소가 5.8까지 떨어진 채로 다시 병원을 찾아온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저장고, 즉 페리틴 수치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치료를 끊으면 재발까지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철분 저장고를 완전히 채우려면 보통 6개월에서 길게는 12개월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경구용 철분제의 흡수율이 약 10% 수준에 불과하고, 오심·더부룩함·변비 같은 소화기계 부작용이 매우 흔하다는 점입니다. 장기 복용이 필수인데 부작용으로 복약을 포기하는 악순환이 생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최근에는 고농도 철분 주사제가 이 문제의 대안으로 적극 활용되고 있습니다. 한 번의 정맥 주사로 3개월치에 해당하는 1,000mg의 철분을 15분 내외에 보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소화기 부작용 없이 단시간에 충분한 양을 공급할 수 있어, 경구제 복용이 어려운 환자에게 전문가들이 강력히 권고하는 방식이 됐습니다.
수혈에 대해서도 오해가 있는데, 혈압이 급격히 떨어지는 등 생명이 위험한 응급 상황이 아니라면 수혈은 불필요합니다. 철분을 보충하면 충분히 교정되는 상태에서 굳이 수혈을 받을 이유가 없고, 오히려 수혈에는 감염 위험을 비롯한 별도의 부작용이 따릅니다.
검진의 필요성 — 빈혈이 대장암을 먼저 알려준 사례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저는 그때 헌혈 검사에서 철분 부족이 나왔을 때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는데, 사실 그 판단이 맞는 상황이었다고는 지금도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다행히 그 이후 헌혈을 다시 할 때 문제가 없었으니 일시적인 상태였겠지만, 만약 40대 이후에 같은 결과가 나왔다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40세 이후에 철결핍성 빈혈이 처음 나타난 경우에는 반드시 위·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실제로 80세 환자가 피로와 숨 가쁨을 이유로 병원에 왔다가, 철결핍성 빈혈의 원인 검사를 통해 대장암을 발견하고 수술로 완치된 사례가 있습니다. 위장관 출혈이 원인인 철결핍성 빈혈을 철분제만 복용하며 방치하면, 출혈의 원인 자체가 해결되지 않으니 치료 성공률도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임기 여성의 경우 월경 양이 지나치게 많거나 주기가 불규칙한지 함께 살펴봐야 합니다. 반면 40대 미만 남성에게 빈혈이 생기는 경우는 국내 유병률이 1~2% 수준에 불과할 만큼 드물기 때문에, 이 나이대 남성에게 빈혈이 확인됐다면 반드시 다른 기저 질환을 의심해야 합니다.
또한 빈혈을 고치겠다며 사혈(寫血)을 하거나, '고기를 많이 먹으면 된다'고 식이로만 해결하려는 분들도 있는데, 소 생간 12.5kg을 먹어도 흡수율이 낮아 철분 1,000mg을 보충하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음식의 역할은 예방 보조에 그치고, 이미 발생한 철결핍성 빈혈은 반드시 철분제 또는 주사제를 통해 치료해야 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빈혈인데 어지럽지 않으면 괜찮은 건가요?
A. 증상이 없다고 빈혈이 아닌 것도, 방치해도 되는 것도 아닙니다. 헤모글로빈이 6 미만인데도 증상을 전혀 못 느끼는 분이 있는 반면, 8 수준에서도 일상이 힘든 분도 있습니다. 빈혈은 증상 유무와 관계없이 원인을 찾고 반드시 교정해야 하는 상태입니다.
Q. 철분 많은 음식을 열심히 먹으면 철결핍성 빈혈이 나을 수 있나요?
A. 일반적으로 시금치나 고기를 먹으면 철분이 보충된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미 철결핍성 빈혈이 발생한 상태에서는 식이 섭취만으로 빠른 교정이 불가능합니다. 철분 1,000mg을 보충하려면 소 생간을 12.5kg 먹어야 하고, 그마저도 흡수율이 낮습니다. 발생한 빈혈은 철분제나 주사제로 치료해야 합니다.
Q. 철분제 먹고 수치가 정상 됐는데 언제까지 먹어야 하나요?
A. 헤모글로빈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오는 데는 약 2개월이 걸리지만, 이 시점에서 멈추면 재발이 빠르게 옵니다. 체내 철분 저장고를 나타내는 페리틴 수치가 충분히 회복될 때까지 6~12개월간 치료를 이어가야 하며, 주기적인 혈액검사로 확인하면서 진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Q. 철분 주사가 경구 철분제보다 효과가 더 좋은가요?
A. 효과 면에서는 두 방법 모두 빈혈을 교정할 수 있습니다. 차이는 편의성과 부작용에 있습니다. 경구 철분제는 오심·변비·더부룩함 같은 소화기 부작용이 흔해 장기 복용이 어려운 반면, 고농도 정맥 주사제는 한 번 투여로 3개월치 철분을 15분 내에 보충할 수 있어 소화기 부작용 없이 치료를 완료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결론
고등학교 때 헌혈 버스 앞에서 돌아서던 기억이 이번에 새롭게 정리됐습니다. 그때의 저처럼 '빈혈은 마른 여자 주인공이나 걸리는 것'이라거나, '어지럽지 않으면 괜찮다'거나, '고기 많이 먹으면 낫는다'는 생각은 전부 잘못된 상식입니다. 빈혈은 원인이 다양하고, 원인마다 치료 방향이 완전히 다르며, 심할 경우 대장암처럼 심각한 기저 질환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제 경험상 건강검진에서 혈액 수치를 그냥 훑고 지나치기 쉬운데, 특히 40세 이후에는 헤모글로빈과 페리틴 수치를 반드시 챙겨봐야 합니다. 빈혈이 확인됐다면 임의로 판단하지 말고 혈액 전문의와 상의해 원인부터 찾는 것이 순서입니다.